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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헌정위기
March 29 Constitutional Crisis in Ruina, 1984
파일:1984_루이나_헌정위기.webp
발생 일시
1984년 3월 29일 11시 12분 (RST)[1]
유형
헌정질서 파괴, 극우폭력, 차량 돌진 테러, 의회 공격
발생 위치
루이나 국회의사당 북문 진입로 및 벨포르 중심부
주요 원인
테디 해밀턴 대통령의 헌법 개정을 통한 3선 시도
이를 저지하려는 의회의 저항에 대한 극우 지지세력의 물리적 공격
피해
시설
국회의사당 북문 돌진으로 정문 파괴
의회 차량 3대 전소, 외곽 경비선 파괴, 방화 시도 다수
부상
벨포르 경찰청 소속 경찰관 19명
의회 직원 및 민간인 11명, 폭도 4명 포함 총 34명 부상
사망
경비원 2명, 민간인 1명, 폭도 1명 사망[2]
기타
야당 의원 긴급 대피
의회 회의 중단
체포 인원
총 102명 검거[3]
영향
테디 해밀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
사회민주당(루이나) 주도 전국 시위 확산 및 시민불복종 운동 개시
랭스턴 대통령 당선
1. 개요2. 원인
2.1. 마테르 전쟁과 계엄령2.2. 전후 권력의 사유화와 의회 무력화2.3. 헌법을 위반한 3선 출마 선언2.4. 극우 지지층의 과격화와 정치 폭력의 현실화
3. 전개
3.1. 3월 26일3.2. 3월 27일3.3. 3월 28일3.4. 3월 29일3.5. 3월 30일
4. 영향5. 각국 반응6. 여담

1. 개요 [편집]

1984년 3.29 헌정위기는 루이나 제9대 대통령 테디 해밀턴(Teddy Hamilton)이 헌법에 반하여 3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촉발된 중대한 정치적 위기 사태이다. 루이나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한 차례까지만 허용하고 있었으며,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사회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한 의회는 해밀턴의 3선 추진을 명백한 위헌으로 간주하고 즉각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에 반발한 해밀턴의 극우 지지층은 급속히 과격화되었고, 1984년 3월 29일, 민간 극우조직 ‘조국의 방패(Patriot’s Shield)’ 소속 인원들이 벨포르 국회의사당 북문에 차량 돌진 테러를 감행했다. 이들은 의회의 3선 반대를 "국민 주권에 대한 배신"이라 규정하며, 차량 2대를 정문 경비선에 고의 충돌시키고 이어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사용한 공격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경비원 2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 30여 명이 부상하였고, 국회의사당 정문이 파괴되고 의회 차량 여러 대가 불에 탔다. 사건 직후 벨포르 경찰청 특공대가 신속히 현장에 투입되어 추가 피해를 막았으며, 루이나 광역수사국(MIA)의 전국 단위 수사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관련자와 공모자 등 총 102명이 체포되었고, 일부는 무기 불법소지 및 내란선동 혐의로 기소되었다.

3.29 헌정위기는 루이나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이후 테디 해밀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 전국적 반정부 시위, 정상적으로 치뤄진 대선 및 헌법 개정으로 이어지며 루이나 정치체제의 재구조화를 이끌었다. 이 사건은 루이나 헌정사에서 대통령 권력의 사적 남용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각인시킨 역사적 사례로 기록된다.

2. 원인 [편집]

1984년 3.29 헌정위기의 직접적 도화선은 테디 해밀턴 대통령의 헌법 위반 3선 출마 선언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수년에 걸쳐 누적된 전시 권력의 사유화, 제도적 통제 실패, 사회적 극단주의의 성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위기는 단지 대통령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시 체제에서 태동한 비상통치 권력이 평시에도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며 국가 권력 전반을 뒤틀어간 과정에서 비롯된 구조적 결과였다.

2.1. 마테르 전쟁과 계엄령 [편집]

1983년, 루이나는 마테르 전쟁에 참전하며 국가 전체가 전시체제로 전환되었다. 당시 제9대 대통령이었던 테디 해밀턴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전시비상령 및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방·외교·치안에 관한 모든 권한을 행정부로 집중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루이나의 의회 기능은 제한적으로 축소되었고, 언론 검열, 공공 집회 금지, 정당 활동 등록제 강화 등이 뒤따랐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로서는 마테르 전선의 격화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여졌으며, 국민 대다수도 일시적 희생으로 감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전쟁이 1983년 말, 사실상 루이나의 전략적 개입 종료 및 휴전 합의 체결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해밀턴 행정부가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는 "완전한 안보 불안정 해소 전까지는 통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며 각종 비상조치 조항을 갱신, 대통령령으로 통치하는 체제를 사실상 고착화했다.

2.2. 전후 권력의 사유화와 의회 무력화 [편집]

전쟁 종료 이후에도 해밀턴은 전후복구사업, 안보위협, 테러위험 등을 이유로 정부 비판 세력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특히 사회민주당(루이나)을 중심으로 한 야당들은 이 시기에 “이미 전쟁은 끝났고, 민주적 통제는 복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부는 야당의 주장을 ‘사회 불안 조장’으로 규정하며 이들의 대중집회 및 매체 출연을 차단했다.

1982년과 1983년 사이, 루이나 의회는 여소야대 구조로 재편되었고, 해밀턴은 법률 제정·예산 편성 과정에서 의회를 우회하는 긴급재정명령, 안보입법 예외조항 등 비정상적 도구를 남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행정부가 입법기능까지 사실상 흡수하게 되었고, 헌법상 삼권분립 원칙은 형해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대통령 직속 기구들이 정보기관, 검찰, 치안조직을 과도하게 통제하면서 정적 제거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의혹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시민사회는 위헌적인 전시행정의 연장을 "비상상황의 영속화"라고 비판하며 해밀턴 정권의 독주를 경고했으나, 여당과 국가 언론은 이를 모두 '불온한 선동'으로 일축했다.

2.3. 헌법을 위반한 3선 출마 선언 [편집]

그러던 중, 1983년 12월 2일, 해밀턴 대통령은 벨포르 대통령궁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헌법 제70조를 무시하고 3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루이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전후 재건, 안보, 그리고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저의 헌신이 한 번 더 필요합니다. 헌법은 시대와 역사 앞에 유연해야 합니다.”

이 발언은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루이나 헌법 제70조는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되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음을 명문화하고 있었으며, 이는 1950년 제정 이래 단 한 번도 위반된 적 없는 조항이었다. 야당은 즉각 “해밀턴은 민주정의 원칙을 스스로 부정했다”며 출마 불가 선언과 사퇴를 요구했으며, 각계 시민단체, 법조계, 대학가에서도 연이은 성명과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해밀턴 지지층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지도자에 대한 음해”, “선거는 국민이 판단할 문제”라며 거세게 반발했으며, 특히 일부 극우적 민병조직은 “의회와 법원이 민의를 배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폭력적 행동을 시사하였다.

2.4. 극우 지지층의 과격화와 정치 폭력의 현실화 [편집]

그중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민간 극우 민병조직 ‘조국의 방패(Patriot’s Shield)’였다. 이들은 본래 파시스트 중심의 정치단체였으나, 해밀턴 집권기에 메가처치의 지원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했고, 점차 친정부적 극우 정서를 선동하는 행동조직으로 변모하였다.

1984년 초, “조국의 방패”는 의회의 3선 반대 결의안이 가결되자 이를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내부 지령을 통해 의회에 대한 직접 행동을 독려하였다. 이들은 해밀턴 대통령이 폭력을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단죄하거나 자제시키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1984년 3월 29일 오전, “조국의 방패”는 벨포르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북문을 향해 차량 돌진 테러를 감행하며, 이 모든 위기가 물리적 충돌로 폭발하게 된다.

3. 전개 [편집]

3.1. 3월 26일 [편집]

1984년 3월 26일, 루이나 전역에서는 사상 초유의 규모로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No More King’, “루이나는 군주제가 아니다”, “헌법을 지켜라”는 구호가 하루 만에 전국 도시의 거리와 광장을 메웠다. 이 대규모 시위는 특정 정당이나 단일 단체가 조직한 것이 아니었다. 수도 벨포르를 포함한 루이나 전역 100여 개 도시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시위는, 시민단체와 대학생, 종교계, 노동조합, 법조계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이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참여한 전례 없는 연대 행동이었다.

이 시위는 테디 해밀턴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고 3선 출마를 선언한 데 대한 헌정 수호적 저항이었다. 헌법 제70조는 대통령의 1회 연임만을 허용하고 있었고, 이는 루이나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해밀턴은 “국가 안정을 위해 다시 선택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헌법을 국민의 뜻보다 하위에 두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순간, 국민들은 대통령이 더 이상 공화국의 수호자가 아닌, ‘스스로를 왕으로 여기기 시작한 권력자’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No More King”이라는 구호는 하루아침에 하나의 국민적 명제가 되었다.

이날 벨포르에서는 약 40만 명 이상이 시청 광장과 리버티 거리 일대를 메우고 평화 행진을 벌였다. 참가자들은 침묵 속에 헌법 낭독문을 들었고, 국회의사당을 향해 검은 리본과 백합을 던지며 비폭력적 방식으로 슬픔과 분노를 표현했다. 수천 명의 변호사들이 법복을 입은 채 “법 위의 권력은 없다”고 외쳤고, 학생들은 “우리는 왕을 뽑은 적이 없다”는 손팻말을 들었다. 콜마르, 오보레, 사보레, 크레테, 롱비치, 나보레 등 주요 도시들에서도 십만 명 단위의 시위가 일제히 벌어졌고, 중소도시와 농촌 지역까지도 시위의 열기를 피하지 않았다. 특히 오보레에서는 대학 교수단이 학생들과 함께 성명을 발표하며 "헌법은 계약이다, 대통령은 계약의 당사자이지 계약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경찰과의 충돌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했으나, 대체로 시위는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벨포르 시내에서는 경찰이 집회 확산을 막기 위해 차단선을 설치하고 물대포를 배치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좌시했다. 그러나 인파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밀고 당기는 와중에 몇 차례의 물리적 접촉이 있었고, 부상자 40여 명이 발생했다. 다행히 사망자나 중상자는 없었으며, 이는 주최 측과 경찰 양측의 비폭력 원칙 준수 덕분이었다.

정부는 시위 직후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궁 대변인은 “대통령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며 시위의 의미를 인정하는 듯한 모호한 언급을 남겼다. 반면 야당인 사회민주당과 루이나 민주공화당은 공동 성명을 통해 “국민은 오늘 분명히 말했다. 해밀턴은 내려와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여당 내부에서도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했고, 일부 중도 성향 의원들은 “대통령이 이대로 밀어붙일 경우 국정운영의 정당성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1984년 3월 26일, 루이나 전역에서 ‘No More King’ 시위가 폭발적으로 벌어졌던 그날, 테디 해밀턴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는 극우 민간조직 ‘조국의 방패(Patriot’s Shield)’ 역시 별도의 지지 집회와 성명 발표를 통해 정면으로 맞섰다.

이 단체는 파시스트 성향의 반공·권위주의적 시민조직으로, 루이나 군사독재 시절의 질서 회귀를 노골적으로 주장해온 조직이었다. 조직원 다수는 퇴역 군인, 청년 남성 극우 운동가, 무장훈련 경험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해밀턴 정권 들어 정치적으로 점차 전면에 등장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벨포르 시 외곽 자치구청 광장에 약 3천여 명의 조국의 방패 지지자들이 모여 별도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대통령을 지켜내자’, ‘의회는 썩었다’, ‘헌법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국회와 언론, 그리고 반정부 시위대를 강하게 비난했다. 특히 그날 현장에서 낭독된 성명서는 수위가 매우 높았다.
"국민은 대통령을 배신하지 않는다."
루이나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거짓 헌법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 대통령은 선출된 국민의 대표이며, 국민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다.
거리로 나선 자들은 조작된 선동에 현혹된 자들일 뿐, 진정한 시민이 아니다.
의회는 권력을 독점하고, 대통령의 헌신을 가로막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쿠데타이며, 우리는 대통령과 국가를 수호할 것이다.
피를 흘리게 된다면, 그 책임은 국민을 기만한 자들에게 있다.

성명 발표 직후, 일부 ‘조국의 방패’ 소속 집회 참가자들이 벨포르 시내 중심부로 이동하던 ‘No More King’ 시위대와 마주치면서 양측 간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구호 대결과 언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깃발 뺏기, 물병 투척, 몸싸움으로 번졌다. 일부 참가자들이 쇠막대기, 깃대, 철제 피켓을 사용한 정황이 포착되었고, 경찰이 개입해 해산에 나서기 전까지 최소 17명이 부상했다.

3.2. 3월 27일 [편집]

1984년 3월 27일, 테디 해밀턴 대통령은 ‘No More King’ 시위로 전국이 들끓은 지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대통령궁 정원에서 생중계된 짧은 회견에서, 그는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도 루이나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모든 시민에게 감사한다”며 말문을 열었고, 곧바로 논란의 중심에 선 조직, ‘조국의 방패’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이어갔다.
“어제 일부 시민들이 과격한 구호를 외쳤고, 충돌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국의 방패를 포함해 우리 체제를 지키려는 모든 애국적 행동에 감사드립니다. 국가를 지키겠다는 그 용기와 책임감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입니다.”

이 발언은 사실상, 헌법 질서 수호를 외친 시위대보다 대통령 본인을 위해 무장 시위를 벌인 극우 집단을 두둔한 셈이었다. 담화가 방송되자마자, 국회는 물론 언론과 시민사회, 야당 전체가 일제히 반발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것은 사회민주당이었다.

사회민주당 대변인 마르셀 가르니에는 당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발언을 “헌정질서에 대한 정면 공격이자, 폭력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테디 해밀턴은 더 이상 국민 전체의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위해 폭력을 승인했고, 헌법을 무력화하고 있다. 어제 조국의 방패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시민을 공격했음에도 대통령은 그들에게 ‘고귀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독재자의 언어다.”

또한 사회민주당 원내대표 에멧 보숑은 국회 긴급 본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대통령이 폭력조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든다면 “즉각 탄핵 절차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일부 당 의원들은 “이제 대통령과 헌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며, 여당 내 온건 세력에게도 공개적으로 해밀턴과의 결별을 촉구했다.

언론 또한 이 문제를 집중 보도하며, “대통령이 무장 민병조직을 정치 도구로 삼았다”, “루이나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사설을 연이어 실었다. 특히 《벨포르 타임스》는 사설에서 “만약 대통령이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더 큰 사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시민 충돌과 내란 가능성까지 경고했다.

대통령의 논란 많은 발언이 방송된 그날 저녁, 루이나 정치의 긴장감은 단순한 수사적 대립을 넘어 직접적인 위협의 국면으로 돌입했다. 테디 해밀턴이 극우단체 ‘조국의 방패’를 사실상 옹호한 이후, 이들을 추종하는 과격 지지자들의 활동은 급속도로 노골화되었고, 마침내 사회민주당 의원을 향한 물리적 폭력 시도로 이어졌다.

그날 밤, 벨포르 국회의사당에서 예정된 비공개 긴급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던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 에밀 라로슈(Émile Laroche)의 차량이 의사당 북측 출입구 인근 골목길을 지나던 중, 길가에 서 있던 정체불명의 남성 네다섯 명의 무리에 의해 공격당했다.

이들은 차량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계란과 돌멩이를 투척했고, 그중 한 명은 쇠파이프를 들고 조수석 유리를 내리치려 시도했다. 운전기사는 즉시 후진으로 현장을 벗어났으며, 라로슈 의원은 신체적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차량 앞유리 일부가 파손되고, 뒷문에는 둔기로 찍힌 자국이 남았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인근에 흩어져 있던 남성 세 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했으며, 이들 중 두 명은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와 ‘조국의 방패’ 지부 활동 이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의회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 “의원들을 쏴죽여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급진적인 발언을 반복했다고 한다.

사건 발생 이후, 사회민주당 측은 “의원을 향한 공격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며, 이는 대통령의 발언이 불러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당 대표단은 긴급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해밀턴 대통령이 폭력을 조장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통령이 법을 부정하고 폭력을 미화한 순간, 그 지지자들은 바로 행동에 나섰다. 오늘은 의원의 차량이지만, 내일은 국회 본회의장일 수 있다.”

여당 지도부는 공식적인 입장을 자제했으나,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일부 중도 성향 의원들조차 “더는 무조건적인 대통령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루이나 정국의 분위기를 단순한 법적·정치적 대립에서 실질적인 물리적 위협과 폭력의 단계로 전환시킨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많은 언론은 이때부터 “3.29를 향한 시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3.3. 3월 28일 [편집]

1984년 3월 28일, 루이나 전역은 다시 한번 거대한 파도로 뒤흔들렸다. 사흘 전 벌어진 ‘No More King’ 시위보다 더욱 격렬한 목소리와 인원이 쏟아져 나왔고, 이는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진정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신호탄이었다. 이날 시위는 전날 테디 해밀턴 대통령이 극우단체 ‘조국의 방패’를 두둔한 발언 이후 국민적 반발이 폭발한 결과였다. 주요 신문과 방송, 심지어 해밀턴에게 우호적이던 일부 지역 언론까지도 “대통령이 폭력을 승인했다”, “이제 국회가 아니라 거리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논조로 돌아선 상황이었다.

수도 벨포르에서는 약 495만 명이 도심에 운집했다. 시청 광장과 루이나 대법원 앞 도로, 국회의사당 남문까지 전 구간이 인파로 가득 찼으며, 시민들은 해밀턴의 사퇴를 요구하며 “우리는 왕을 선택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해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콜마르, 롱비치, 오보레, 크레테 등 80여 개 도시에서도 중·고등학생부터 퇴역 군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특히 전날 의회 의원 차량을 향한 공격 사건이 보도된 직후였기에, 시위 참가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격앙되었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궁에서는 대단히 강경한 대응 지시가 내려졌다. 테디 해밀턴 대통령은 내부 지휘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고 알려졌다.
“이제는 끝장을 볼 때다. 그들이 국가를 거부한다면, 국가는 그들을 멈춰야 한다. 더는 물러서지 말라. 해산시키고, 필요하면 구금하라.”

이에 따라 대통령실은 내무부와 벨포르 경찰청에 ‘현장 검거 및 해산 우선 조치’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곧 현장에서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벨포르 경찰청장과 각 도시 경찰서장들은 “현장 상황이 과열될 경우 대규모 충돌과 사망자 발생이 불가피하다”며 현장 진입을 유보하거나, 완화된 방식으로 시위를 방치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실제로 일부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울타리를 넘으려 했으나, 경찰은 방패벽을 설치하되 진압봉이나 체포조를 투입하지 않았고, 시위대 또한 “비폭력 수칙”을 자발적으로 유지하면서 대규모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부상자 없이 마무리된 유례없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였다.

내부 소식에 따르면, 벨포르 경찰청은 이미 3.26 시위 당시 경찰 상층부와 정권 간의 온도차를 인지하고 있었고, 강경 진압 시 정권의 정당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소극적 대응’을 택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경찰노조 또한 이날 이후 “우리는 국민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내면서, 해밀턴 정부와 명백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3월 28일 오후 4시 12분, 벨포르 중심부 루테랑 거리에서 루이나 현대정치사상 최초로 자동화기 무차별 난사에 의한 민간인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이 비극은 테디 해밀턴 대통령이 3선 출마 강행 의지를 거듭 밝힌 가운데,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의 와중에 발생한 것으로, 정치적 폭력이 상징이 아닌 현실의 총성으로 바뀐 날로 기록된다.

사건은 시민들이 ‘No More King’ 집회를 마친 뒤 귀가하던 중 발생했다. 시내 중심에서 외곽으로 이동하던 시위 참가자 무리를 향해, 민간 극우조직 ‘조국의 방패(Patriot’s Shield)’ 소속의 20대 남성 조직원 한 명이 불법 개조된 AR-15 소총을 들고 돌연 등장했다.

그는 루테랑 거리와 페르낭 거리 교차지점의 고가 주차장 출입구 위에서 약 60초 동안 무차별적으로 200여 발을 난사했다. 총성이 울린 직후, 거리에는 비명과 피난 행렬이 뒤엉켰고, 수십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현장에서 시민 31명이 사망, 52명이 총상 또는 파편상으로 중경상을 입고 병원에 긴급 이송되었다. 사망자 중에는 17세 고등학생 아델린 브루네(Adeline Brunet), 상점 직원이던 41세 여성 이본 트르농(Yvonne Ternon), 퇴직 공무원이던 63세 남성 레몽 바예(Raymond Baillet)가 포함되었으며, 모두 등이나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가해자는 정식 군이나 경찰 소속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AR-15 반자동 소총을 풀오토 사격이 가능하도록 불법 개조한 상태에서 사용했다.

현장 검거 당시, 그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는다”, “공화국은 이미 끝났다”는 말을 반복하며 저항했고, 벨포르 경찰 특공대가 진입하여 저격 위치에서 그를 체포하였다. 소지품에서는 ‘의회를 해체하라’, ‘사민당을 숙청하라’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 조국의 방패 중앙조직 명의의 문서, 추가 탄창 3개와 소형 권총 1정이 발견되었다.

사건 직후, 벨포르 시는 사실상 비상 상황에 돌입했다. 헌정 위기라는 단어가 더 이상 추상적인 수사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시민이, 거리에서, 정치적 주장 하나로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이 충격적인 소식이 전국에 중계되자, 시민사회와 야당, 언론은 거의 동시에 대통령 책임론을 공식화했다. 사회민주당 대표단은 긴급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대통령은 불과 이틀 전, 이 집단을 ‘고귀하다’고 칭송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시민의 피다. 대통령은 오늘을 기점으로, 더 이상 합법적 통치자가 아니다. 그는 총을 들고, 헌법을 버렸다.”

이 사건 이후, 조국의 방패는 공식적으로 “테러조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벨포르 시민들은 즉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고, “피를 멈춰라”, “그는 우리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팻말이 시내 전역에 걸렸다.

그럼에도 대통령궁은 사건 직후 18시간 동안 일체의 언급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3.4. 3월 29일 [편집]

3.5. 3월 30일 [편집]

4. 영향 [편집]

5. 각국 반응 [편집]

6. 여담 [편집]

[1] 루이나 표준시 기준[2] 차량 내 자폭 장치가 미완성 상태였음에도 화염에 의한 질식사 발생.[3] 극우조직 "조국의 방패" 지지자들로 확인됨. 루이나 전역에서 수일간 연쇄 체포 작전이 이어졌으며, 무기·폭발물 불법 보관 정황도 포착됨.